[보드게임의 세계] 즐거운 언어 두뇌 대결, '라온'

안수영 syahn@itdonga.com

라온
라온

라온 (2014) <출처: divedice.com>

손으로 터치하는 게임들이 범람하고, 각종 최신 전자장비가 게임을 위해 개발되는 요즘. 어른이 되어 잃어버린 재미가 하나 있다. 바로 글을 읽는 재미다. 독서를 즐기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한글을 배워가던 어린 시절에 간판을 제대로 읽어내려 하거나, 손으로 끊임없이 글자를 흉내내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한글 공부라기보다는 재미로 글자를 그리곤 했던 그 어린 시절. 어느 샌가 한글은 너무나 익숙해져 그 배우는 재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지만, 어린 시절 그 즐거움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게임이 있다. 오늘 소개할 '라온'이다.

게임 방법

라온은 2가지 방법으로 게임을 즐길 수 있다.

라온 게임 방법 1. 가장 많은 단어
만들기
라온 게임 방법 1. 가장 많은 단어 만들기

라온 게임 방법 1. 가장 많은 단어 만들기 <출처: divedice.com>

첫 번째 방법은 가장 많은 단어를 만드는 게임이다. 타일을 섞은 뒤, 각 플레이어들은 자음 타일 11개와 모음타일 9개씩을 각자 나눠 갖는다. 플레이어들은 3분 동안 각자 나눠 받은 타일을 최대한 이용해 여러 단어를 만든다. 이 때, 크로스워드 퍼즐(crossword puzzle)처럼 가로 세로로 글자를 연결해 단어를 만들 수 있다.

3분이 지나면 점수를 계산한다. 1글자 단어는 1점, 2글자 단어는 3점, 3글자 단어는 6점 등으로 점수를 부여한다. 긴 단어를 만들수록 큰 점수를 받는다. 20개의 타일을 전부 사용해서 단어를 만들었다면 추가로 10점을 얻는다.

라온 게임 방법 2. 가장 긴 단어
만들기.
라온 게임 방법 2. 가장 긴 단어 만들기.

라온 게임 방법 2. 가장 긴 단어 만들기. 타일 13개를 사용하는 아프가니스탄을 만들려고 했지만, 'ㄴ'이 없다. 타일 12개를 사용한 텔레비전이 승리한다. <출처: divedice.com>

두 번째 방법은 바닥에 놓인 타일들을 눈으로만 보고, 가장 많은 타일을 사용해 단어를 조합하는 게임이다. 자음 타일 14개를 세로로 2줄, 모음 타일 10개를 세로로 2줄이 되도록 늘어놓는다. 이제 모래시계를 뒤집고, 바닥에 놓인 타일들을 눈으로만 보아 머릿속으로 단어를 만들고 사용한 타일의 개수를 외친다. 예를 들어 '자동차'라는 단어를 생각했다면 'ㅈ, ㅏ, ㄷ, ㅗ, ㅇ, ㅊ, ㅏ'를 사용하니 총 7개의 타일을 사용하는 셈이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면 가장 높은 숫자를 외친 사람부터 타일을 가져와 단어를 만든다. 단어를 만드는데 성공하면 타일을 가져와 개당 1점씩 점수를 받는다. 단어를 못 만든 경우에는 그 다음으로 높은 숫자를 외친 플레이어가 단어를 만들면 된다. 점수를 획득하면 남은 타일로 빈 자리를 채우고, 다시 게임을 시작한다. 이렇게 누군가 25점을 얻으면 게임에서 승리한다.

대표적인 단어 게임

외국에서 단어 게임(Word game)은 흔히 게임 테마(Theme) 중 하나로 분류되며, 언어능력을 활용하는 게임을 주로 지칭한다. 크로스워드 퍼즐(Crossword), 행맨(Hangman) 등이 유명하며, 보드게임 중에서는 스크래블(Scrabble, 1948), 보글(Boggle, 1972)이 이 카테고리의 대표작으로 손꼽힌다.

크로스워드 퍼즐
크로스워드 퍼즐

크로스워드 퍼즐 <출처: Wikipedia.org>

세계에서 가장 잘 널리 알려져 있고, 대중적인 단어 게임은 크로스워드 퍼즐(Crossword)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로세로퍼즐', '십자말풀이' 등으로도 불리며, 주어진 칸을 토대로 문제를 풀어 채워가는 형식이다. 칸이 겹치는 경우에는 특정한 글자를 미리 알 수 있어, 다른 문제의 해답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이 게임은 19세기에 발명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최초의 크로스워드 퍼즐이 어디서 시작했는지는 아직 의견이 분분하다. 다만,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형태가 1913년 12월 21일, 영국 리버풀의 저널리스트인 아서 웨인(Arthur Wynne)이 뉴욕 월드지에 출판한 워드크로스(Word-cross) 퍼즐에 대부분 유사하게 구현되어 있다.

따라서 이 게임을 최초의 크로스워드 퍼즐로, 아서 웨인을 최초의 크로스워드 퍼즐의 개발자로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이 퍼즐은 매주 정기적으로 신문에 연재되며 다른 신문으로 퍼져나갔다. 1924년 이후 크로스워드 퍼즐은 책으로도 출판돼 화제를 모았고, 오늘날 신문이나 온라인을 통해 다양한 형태로 선보이고 있다.

행맨
행맨

행맨. 정답은 boardgame <출처: divedice.com>

행맨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대체로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로 여겨진다. 행맨은 연필과 종이를 이용한 추리 게임으로, 2명 혹은 그 이상의 플레이어가 참여할 수 있다. 한 명이 출제자가 되어 단어, 문자, 격언 등의 문제를 내면, 다른 사람들은 글자나 숫자를 제시하며 추리, 정답을 맞춰야 한다. 제시한 글자가 틀릴 때마다 한 획씩 목 매단 사람을 그리게 되며, 그림이 완성되면 모두가 게임에서 패배한다.

2008년 일본에서는 원어민 교사들이 사용하는 행맨이 자살을 부추긴다 하여 논란이 일기도 했다. 때문에 몇몇 교사들은 사과나무 등 다른 그림으로 대체하기도 한다.

스크래블
스크래블

스크래블 <출처: divedice.com>

'스크래블'은 15 X 15로 나뉜 칸을 가진 게임판에 글자 타일을 내려놓아 점수를 얻는 게임이다. 글자 타일을 조합해 단어를 구성해야 하며, 크로스워드 퍼즐처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위에서 아래로 글자가 이어져야 한다. 글자의 사용 빈도에 따라 각각 점수가 부여되어 있으며, 게임판의 위치에 따라 글자 혹은 단어의 점수를 2배 혹은 3배로 얻을 수 있다.

스크래블은 1938년 건축가 알프레드 모셔 버츠(Alfred Mosher Butts)의 '렉시코(Lxciko)'라는 게임에서 영감을 받았다. 렉시코는 뉴욕타임즈(The New York Times)와 같은 여러 자료에서 알파벳의 사용 빈도를 조사해, 이를 글자 타일의 점수 및 개수로 반영했으며, 이와 같이 통계를 중심으로 한 타일 구성은 이후 스크래블에도 이어졌다.

알프레드는 렉시코에서 게임판을 추가해 크로스워드 게임 형태를 취한 놀이를 새롭게 만들었고, 이렇게 개량한 게임을 '크리스- 크로스워드(Criss-Crosswords)'라고 이름 붙였다. 보통 이 게임을 스크래블의 기원으로 여긴다. 알프레드는 수작업으로 이 게임을 제작해 판매했지만, 주요 게임 제작사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결국 그는 1948년 제임스 브루놋(James Brunot)에게 크리스- 크로스워드에 관한 모든 권리를 판매했다.

제임스 브루놋은 게임판에 보너스 칸을 추가하고 규칙을 다듬어 '스크래블'이라는 이름으로 출판했다. 이후 스크래블은 유통 채널을 개척하며 승승장구했고,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성장했다. 스크래블은 세계 121개국에서 29개 언어로 1억 5000만 개 이상 판매됐다. 국내에서는 영어 교육 게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보글은 최근 전자 장치를 도입해 주사위를 섞는 과정 및 타이머 설정 등 편의성이
더해졌다.
보글은 최근 전자 장치를 도입해 주사위를 섞는 과정 및 타이머 설정 등 편의성이 더해졌다.

보글은 최근 전자 장치를 도입해 주사위를 섞는 과정 및 타이머 설정 등 편의성이 더해졌다. <출처: divedice.com>

'보글'은 알랜 트로프(Allan Turoff)가 개발한 단어 게임이다. 이 게임은 글자가 새겨진 주사위 16개를 활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3분 동안 이 주사위를 조합해 많은 단어를 만들면 된다. 여러 플레이어가 같은 단어를 만들면 해당 단어는 게임에서 제거하고, 남은 단어에 따라 점수를 받는다. 이때 단어의 길이에 따라 차등적으로 점수를 받는다. 보글 역시 스크래블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영어 교육 게임으로 널리 알려졌다.

그렇다면 대표적인 한글 게임은 무엇이 있을까? 아쉽게도 '라온' 외에 다른 한글 보드게임은 찾기 어려운 것이 실정이다. 많은 이들이 한글을 기반으로 한 게임을 개발하려고 했지만, 상용화는 하지 못한 채 아이디어 수준에서 그쳤다. 이러한 상황에서 라온이 개발되었다는 것은, 앞으로 한글 기반의 단어 게임이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 기반이 생겼다고 해석할 수 있다.

게임 개발 과정

라온은 2008년 한글 단어 게임의 필요성에 따라 개발된 게임이다. 게임 개발을 위해 수많은 종류의 '크로스워드 퍼즐'을 분석했으며, 이 과정에서 '글자 수를 어떻게 줄이는가'가 큰 문제로 부각됐다. 알파벳은 총 26자의 자음과 모음으로 표현이 가능하지만, 한글은 기본 자음, 모음 24자뿐만 아니라 이를 이용해 만든 복합 자음(ㄲ, ㄸ, ㅃ, ㅆ, ㅉ)과 복합 모음(ㅐ, ㅒ, ㅔ, ㅖ, ㅘ, ㅙ, ㅚ, ㅝ, ㅞ, ㅟ, ㅢ)이 추가로 16자 더 있기 때문이다.

이를 모두 타일로 제작하는 것은 어려움이 따를뿐더러, 다양한 단어를 만들기도 어려웠다. 복합 자음과 복합 모음은 모두 16개인데, 이 가운데 복합 모음이 11개였다. 하지만 기본 모음 또한 10개나 되니, 글자 수를 줄이는 데 모음의 처리를 고민하게 됐다. 상대적으로 복합 자음은 구현이 쉽다고 여기기도 했다.

라온의 모음 타일 'ㅏ, ㅑ, ㅣ'로 모든 모음 표현이
가능하다.
라온의 모음 타일 'ㅏ, ㅑ, ㅣ'로 모든 모음 표현이 가능하다.

라온의 모음 타일 'ㅏ, ㅑ, ㅣ'로 모든 모음 표현이 가능하다. <출처: divedice.com>

고심 끝에 라온의 모음은 'ㅏ, ㅑ, ㅣ' 3가지로 제작됐다. 개발 당시 '글씨의 아름다움'을 취하기 위해 모든 모음 타일을 만들어야 한다는 고정관념이 존재했는데, 이를 버리고 글자수의 축소를 우선해 게임성을 극대화했다. 이 세 가지의 위치를 바꾸는 형태로 모든 모음을 다 만들 수 있게 됐다. 지금은 쉬운 개념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이는 한글 게임을 개발하고자 했던 모든 개발자들이 난항을 겪는 문제였다.

물리적인 문제가 해결되자, 이제 남은 문제는 게임의 규칙이었다. 게임의 재미를 살리기 위해, 초기 제작 시 라온은 게임판과 미션 카드를 함께 사용했다.

라온(2008)의 초기 개발 모습
라온(2008)의 초기 개발 모습

라온(2008)의 초기 개발 모습 <출처: gemblo.com>

처음에는 각 플레이어들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글씨 중 자신에게 필요한 몇 글자를 마커로 표시해, 다른 사람이 사용하지 못하도록 막는 방식으로 고안했다. 그리고 미션 카드의 단어를 먼저 만드는 사람이 이기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 게임 방식은 평가가 좋지 못했다.

많은 테스트를 거쳐 최종적으로 게임 규칙이 결정됐다. 플레이어들은 타일을 섞어 각자 가림판을 이용해, 비밀리에 타일을 나눠 가진다. 시작 플레이어부터 돌아가며 가지고 있는 타일로 단어를 만들어 내놓을 수 있는데, 이렇게 가림판 뒤의 타일들을 모두 털어 버리면 게임에서 승리했다.

한글카드로 진행하는 초기 게임 진행
방식
한글카드로 진행하는 초기 게임 진행 방식

한글카드로 진행하는 초기 게임 진행 방식 <출처: divedice.com>

이 규칙과 더불어, 미션 카드의 자음과 모음을 이용해 가장 빨리 단어를 만들면 이기는 스피드 게임 규칙을 추가했다.

이렇게 2가지 규칙으로 제작된 게임에 '즐거운'이라는 뜻을 지닌 순 우리말, '라온'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라온은 2010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상을 수상하며 널리 알려졌고, 점차 한글 보드게임의 대명사로 안착하기 시작했다. 이런 인기는 루미큐브(1977)의 타일을 연상하게 하는 구성물과 스크래블을 연상시키는 게임 형태 때문이었다.

라온 초판
라온 초판

라온 초판 <출처: divedice.com>

2013년 라온은 강연회, 박람회 등을 통해 받은 유저들의 피드백을 반영해 규칙을 개정했다. 기존 방식은 순서를 정해 게임을 진행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실시간 게임 방식에서 더 큰 재미를 느낀다는 점을 반영했다. 이에 기존의 가림판과 카드를 제거하고, 모래시계를 추가했다. 새로운 게임 방식은 일반인들과 게이머들의 호평을 받으며, 최근 무서운 기세로 입소문이 퍼지고 있다.

게임 디자이너 오준원

라온의 디자이너. 오준원
라온의 디자이너. 오준원

라온의 디자이너. 오준원 <출처: gemblo.com>

라온의 디자이너 오준원은 대한민국 1세대 보드게임 디자이너 중 한 명이다. 그는 대학에서 경제, 경영을 전공하고, IT회사에 입사했다. 하지만 닷컴 버블이 터지면서 보드게임 쪽에 눈을 돌리게 됐다. 원래 스타크래프트, 디아블로 등의 유저이기도 했던 그는 화려한 게임 구성물의 중요성을 깨닫고, 2002년부터 게임 디자인을 시작해 2003년 젬블로를 내놓았다.

그는 이 게임을 기반으로 보드게임 사업을 시작했고, 매년 2~3개의 게임을 내놓으며 10년간 사업을 일구었다. 그의 게임들은 미국, 중국 등 세계 각국에서 호평 받았고, 국내에서는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보드게임 디자이너가 됐다.

젬블로
젬블로

대표작 젬블로 <출처: divedice.com>

"창작자에게 보드게임은 매력적인 도전 과제"라고 말하는 그는 '톡톡우드맨(2008)', '블링블링 젬스톤(2012)', '젬블로Q(2013)', '라온(2010)' 등 30여 개의 보드게임을 개발해, 연간 5만 개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고 있다.

게임으로 글을 배우다

라온이 열어놓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라온이 열어놓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라온이 열어놓은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출처: divedice.com>

언어를 기반으로 한 게임은 일반적으로 어휘력이 좋은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하지만 같은 한글로 게임을 하는 만큼, 어휘력에 차이가 있더라도 쉽게 승복하며 모두가 유쾌하게 즐길 수 있다. 게다가 누군가 독특한 어휘를 발휘하면, 그 단어를 즐겁게 익힐 수 있다. 게임이기 때문이다.

한동안 언어를 기반으로 한 보드게임은 영어 교육용으로 사용됐다. 행맨, 스크래블, 보글은 영어 수업시간에 원어민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흥미를 이끌기 위한 도구로 사용된 지 오래다. 보드게임 카페가 붐이었던 2000년대 초기에는 직장을 마치고 보드게임 카페에 들러 커피와 함께 사전을 펼치고 스크래블을 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라온의 개발은 반갑다. 게임 규칙조차 한글로 출시되는 경우가 드문 보드게임 시장에서, 한글을 중심으로 한 보드게임이란 매우 도전적인 시도였다. 이 도전적인 시도는 학부모들의 호평뿐만 아니라 일반 게이머들의 호평까지 끌어내며 성공했다.

또한, 이를 통해 게임으로 글을 배울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렸다. 아마 10년 후에는 라온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나 TV 퀴즈 프로그램이 나오지 않을까. 아니, 최근의 관심이라면 그 시기는 곧 다가올 것도 같다.

글 / IT동아 보드게임 필자, 코리아보드게임즈 권성현
편집 / IT동아 안수영(syahn@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 게임의 세계: 보드게임의 세계(http://navercast.naver.com/list.nhn?cid=2883&category_id=2883)에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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