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인물열전] 설탕물을 팔다 온 스마트폰의 아버지, 존 스컬리

강일용 zero@itdonga.com

대한민국 사람 대부분이 손에 들고 있는 것. 정보화 혁명의 새로운 기수. IT 기술의 총아. 포스트 PC. 표현하는 방법은 참 많지만, 우리는 그것을 보통 '스마트폰'이라고 부른다. 이제는 없으면 생활에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일상화된 스마트폰을 최초로 고안해낸 사람은 누굴까?

스티브 잡스 전 애플 최고경영자라고 대답하는 사람도 적잖이 있을 것이다. 잡스가 스마트폰 대중화의 1등 공신이란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당연히 스마트폰을 고안해낸 사람은 아니다. 흥미롭게도 스마트폰의 아버지는 잡스와 꽤 밀접한 인물이다. 좋은 인연으로든 나쁜 인연으로든.

이견이 조금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마트폰의 아버지를 애플의 전 최고경영자 존 스컬리(John Sculley)로 보고 있다. 그는 스마트폰이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정의한 후, 실제로 그러한 제품을 만들려고 노력했다. 이만하면 스마트폰의 아버지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지 않을까? 존 스컬리가 어떤 인물이고, 우리 삶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한번 자세히 알아보자.

존 스컬리
존 스컬리

<존 스컬리, 출처: 위키피디아>

왕년에 설탕물 좀 팔았습니다

스컬리는 단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는 인물이다. '마케팅의 천재.'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브라운 대학교를 졸업한 후 펜실바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에서 MBA(경영학 석사)를 수료했다. 자신의 재능을 펼치기 위해 가장 먼저 선택한 직장은 ‘펩시 콜라’였다. 그렇다. 그는 왕년에 IT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검은 설탕물을 팔았다.

그는 1970년, 불과 30세의 나이로 능력을 인정받아 마케팅을 총괄하는 부사장의 자리에 오른다. 입사한지 고작 3년만에 이룬 결과다. 유례 없이 빠른 승진이지만, 이는 펩시 콜라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당시 펩시 콜라는 1위인 코카 콜라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극도로 떨어져 있는 상태였고, 회사 매각마저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었다. 그만큼 인재 부족에 시달렸고, 덕분에 스컬리가 두각을 나타낼 수 있었다.

스컬리는 다양한 양과 형태의 펩시 콜라 제품을 출시했고, 만성 적자에 시달리는 스낵 사업 부문을 개선했다. 20만~30만 달러에 이르는 거금을 투입해 ‘펩시 시대’라는 마케팅 캠페인도 전개했다. 광고의 형태와 비용 면에서 기존 마케팅을 압도하는 도전이었다. 도전은 주효했다. 바닥을 기었던 펩시 콜라의 점유율은 야금야금 코카 콜라의 점유율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1975년 실시한 펩시 콜라/코카 콜라 블라인드 테스트 광고였다. 소비자가 눈을 가린 채 펩시 콜라와 코카 콜라를 시음하게 한 후 어떤 것이 더 마음에 드냐고 선택하게 한 상황을 광고로 만들었다. 펩시 콜라는 코카 콜라보다 맛이 떨어진다는 세간의 통념과 달리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 소비자는 펩시 콜라를 선택한다는 내용을 담아서. 이 광고를 통해 스컬리는 '펩시 콜라 = 2류 브랜드'라는 인식을 부수고 '펩시 콜라는 코카 콜라의 경쟁자'라는 이미지를 확고하게 심어주는데 성공했다.

(이때 펩시 콜라가 코카 콜라를 제치고 음료 시장 1위에 올라섰다는 잘못된 정보가 돌아다니고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펩시 콜라의 매출이 코카 콜라를 넘어선 것은 2000년대 초반이고, 그것도 콜라뿐만 아니라 다른 음료를 모두 합쳐서 가능한 수치였다.)

이러한 공로를 바탕으로 스컬리는 1977년 펩시 콜라의 최고경영자에 지명됐다. 역대 최연소 최고경영자가 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를 만나다

그렇게 최고경영자에 오른 후 스컬리는 5년 동안 별 탈없이 펩시 콜라를 경영했다. 하지만 한 야심만만한 청년 사업가와의 만남이 그의 삶을 바꾸게 된다. 스티브 잡스, IBM에 이어 두 번째로 거대한 컴퓨터 기업으로 떠오르고 있던 애플의 창업자였다.

당시 애플은 뛰어난 마케팅 능력을 보유하고 있고, 기업을 경영한 경험이 풍부해 젊은 창업자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부분까지 포옹해줄 수 있는 인재를 찾고 있었다. 스컬리가 여기에 제격이었다.

잡스는 스컬리에게 애플의 최고경영자를 맡아달라고 지속적으로 설득했다. 반신반의하던 스컬리는 잡스의 마지막 한마디를 듣고 애플로 이직을 결심한다.

"설탕물이나 팔면서 남은 인생을 낭비하고 싶습니까? 아니면 나와 함께 세상을 바꿔보고 싶습니까?" (Do you want to sell sugared water for the rest of your life? Or do you want to come with me and change the world?)

이렇게 스컬리는 1983년 애플의 최고경영자로 스카우트돼 이직하게 된다. 컴퓨터와 IT에 대해 전혀 몰랐던 그가 IT와 인연을 맺게 된 순간이다.

스컬리는 그의 강점이었던 광고 마케팅 능력을 활용해 애플을 소비자에게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1984년 1월 22일,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의 시간적 배경이 된 바로 그 해에 1984라는 동일한 콘셉트의 광고를 방영한다. 이 광고를 통해 애플은 '압제자' IBM에 대항하는 '혁신가'라는 이미지를 소비자에게 심어주게 된다. 광고는 성공적이었다. 소비자는 익숙한 IBM PC 대신 '매킨토시'라는 생소한 제품을 선택하기 시작했다. 애플3와 리사(LISA)의 연이은 실패로 위기에 빠져있던 애플을 구해낸 순간이다.

<1984년 1월 22일, 애플이 진행한 광고>

오만한 청년 창업자와의 결별

초기에는 스컬리와 잡스의 사이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잡스 자신이 삼고초려해 데려온 만큼 둘은 언제나 붙어 다니며 긴밀하게 의견을 나눴다.

하지만 스컬리가 최고경영자로서 잡스의 전횡을 견제하기 시작하자 둘의 사이는 틀어지게 된다. 당시 잡스는 성공에 취해 '자신의 결정이 옳다'는 아집에 빠져있었다. 애플3를 설계하며 시끄럽다는 이유로 냉각팬을 제거했다. 그 탓에 애플3는 발열이 심해 틈만 나면 고장 났다. 틈만 나면 고장 나는 제품을 선택할 소비자는 없다.

또한 세계 최초로 GUI(그래픽 유저 인터페이스)를 탑재한 리사를 고안하며 사람들이 이 혁신적인 제품을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열 것이라며 4천 달러라는 엄청난 가격을 매긴다(당시의 물가 기준으로 생각하자. 차 한대를 사고도 돈이 남는 가격이다). 당연히 팔릴 리가 있나.

애플3
애플3

<냉각팬을 없앤 결과 고장이 잦아 소비자들에게 외면 받은 애플3>

스컬리는 이러한 잡스의 옹고집을 반대했다. 혁신적이지만 실용적이지 않은 제품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경쟁자 IBM PC처럼) 철저한 규격화만이 매킨토시의 미래라고 생각했다.

결국 잡스는 스컬리를 몰아내기 위해 계획을 꾸민다. 이 사실은 스컬리의 귀에도 들어갔고, 스컬리는 배신감에 잡스에게 이러한 소문이 사실이냐고 따지게 된다. 잡스는 부인하지 않고 "회사가 누구를 더 신임하는지 투표로 결정하자"고 받아 친다. 잡스는 창업자인 자기 대신 단순히 고용된 최고경영자인 스컬리가 쫓겨날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정작 회사의 임원들을 모아 놓고 진행한 투표 자리에서 쫓아내기로 결정된 인물은 스컬리가 아니라 잡스였다. 회사 관계자들조차 오만한 창업자의 횡포에 진절머리가 나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잡스는 자신이 세운 회사에서 잘리는 굴욕을 맛보게 됐고, 스컬리는 애플의 유일무이한 권력자로서 제품 설계에 관여하게 된다.

21세기를 예언하다

스컬리의 경력을 보면 알겠지만, 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것보단 관리와 마케팅에 더 큰 강점이 있는 인물이다. 잡스를 쫓아낸 후 매킨토시1의 변종 모델과 IBM PC처럼 규격화된 제품인 매킨토시2의 출시를 지휘했다. 또한 중구난방으로 흩어져있던 개발부서를 일반적인 회사처럼 간결하게 통합해 업무 효율을 향상시켰다. 이를 바탕으로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1986년 흑자전환에 성공한다. 이후 매킨토시의 후속모델을 출시하며 회사를 안정적으로 꾸려나가게 된다.

하지만 스컬리에게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도 세상을 바꿀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마음 속에 품고 있었다. 그는 포터블(Portable), 나아가 모바일(Mobile)이 바로 컴퓨터의 발전 방향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1989년 이러한 철학을 바탕으로 애플 최초의 노트북 '매킨토시 포터블'을 출시한다. 하지만 매킨토시 포터블은 너무 두껍고(두께 10cm) 무거웠으며(7.2kg), 형태조차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보단 서류용 가방에 더 가까웠다.

1990년 스컬리는 더 가볍고 세련된 노트북을 개발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탄생한 것이 현대 노트북의 원형을 정립한 ‘파워북’이다. 당시 인기를 끌고 있던 도시바의 '노트북(노트북은 원래 도시바의 상표다)'의 무게는 3.6kg이었다. 파워북은 이를 2.3kg까지 낮추는데 성공했다. 또한 화면, 키보드, 트랙패드(트랙볼 포함) 등을 인체공학적으로 배치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노트북의 원형이 됐다.

애플 파워북 150
애플 파워북 150

<애플 파워북 150>

파워북은 포터블 제품이라고 부를 순 있어도 모바일 제품이라고 부르기엔 부족했다. 그는 더 작은 제품을 원했다. 컴퓨터와 대등한 기능을 갖추고 있으면서 우리 손에 쏙 들어오는 그 어떤 제품을.

지식 안내자 > PDA > 스마트폰

잠깐 예전 얘기로 돌아가자. 스컬리는 1987년 자신의 저서 오디세이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기기를 제안했다.

1) 하이퍼 텍스트로 구성된 데이터 베이스가 모여 이루어진 거대한 네트워크에 통신망을 통해 접속할 수 있어, 이를 바탕으로 사용자가 자신이 원하는 정보에 언제 어디서나 접근할 수 있는 기기여야 한다.

2) 사용자가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기기에 다양한 소프트웨어를 설치할 수 있어야 한다.

3) 언제나 휴대할 수 있도록 작고 가벼워야 하며, 배터리만으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스컬리는 당시로선 생소하기 짝이 없는 이 기기를 지식 안내자(Knowledge Navigator)라고 이름 붙였다. 사용자가 원하는 정보를 손쉽게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안내자가 되라는 의미에서다.

이듬해 애플은 사람들이 지식 안내자를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홍보 동영상을 제작했다. 이 동영상에서 앞에서 설명한 세 가지 개념뿐만 아니라 몇 가지 특성이 추가로 소개됐다.

4) 지식 안내자는 화면에 펜을 접촉함으로써 좀 더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이 펜을 이용해 글을 적거나 그림을 그릴 수 있어야 한다.

5) 사용자가 적은 글씨를 인식해 그것을 하이퍼 텍스트로 바꿔주는 기능과 하이퍼 텍스트를 음성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포함하고 있어야 한다.

6) 펜으로 화면 속 아이콘을 선택하면 소프트웨어가 실행되는 등 직관적인 사용자 환경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식 안내자의 여섯 가지 개념을 요즘 용어에 맞춰 바꿔보자. 인터넷에 접속해 다양한 정보를 찾을 수 있고, 앱을 설치할 수 있으며, 터치스크린을 통해 누구나 간편하게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음성 인식 등 다양한 부가 기능을 갖추고 있고, 주머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작고 가벼우며,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이것의 이름을 알고 있지만, 극적 효과를 위해 다음으로 넘어가자.

스컬리는 지식 안내자가 현실화되길 원했다. 애플 내에 팀을 꾸리고 자신의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한 기기 개발에 착수했다.

그 기기의 개발이 거의 완료된 1992년, 스컬리는 세계 최대의 가전박람회 CES의 기조 연설자로 나와 지식 안내자를 대신할 새로운 용어를 소개한다. 'Personal Data Assistant(개인 정보 단말기)', 줄여서 PDA라는 용어다.

스컬리는 자신이 PDA의 창조자라고 주장하진 않았다. 자기보다 앞서 PDA를 제작한 선구자가 있다고 밝혔다. 영국 사이언사의 사이언 오거나이저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사이언 오거나이저는 지식 탐색보다는 소프트웨어 실행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다며, 애플이 출시할 PDA는 다를 것이라고 전했다. (PDA의 목적은 정보 탐색이며, 소프트웨어 설치 및 실행은 그 목적을 더 쉽게 이루게 해주는 수단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듬해 스컬리와 애플은 현대 PDA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제품인 '뉴턴 메시지 패드(Newton Message Pad)'를 출시하게 된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PDA가 어떤 기능을 갖추고 있어야 하는지 제시했다. PDA에 통신 기능을 강화한 것을 스마트폰과 태블릿PC라고 부르는 점을 감안하면, 뉴턴 메시지 패드가 두 제품의 원형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겠다. 뉴턴 메시지 패드를 고안해낸 스컬리가 스마트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이유다.

스컬리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 출시와 함께 뉴턴 메시지 패드의 근간이 되는 ‘뉴턴 운영체제’를 다른 회사들에게 공개했다. 뉴턴 운영체제로 실행되는 다양한 형태의 기기가 등장하길 기대한 것이다. 그럼으로써 뉴턴 운영체제의 생태계는 더욱 강화되고, 궁극적으로 뉴턴 플랫폼이 탄생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견이 조금 있지만, 최초의 모바일 운영체제 역시 뉴턴 운영체제라는 것이 정설이다)

뉴턴 메시지 패드
뉴턴 메시지 패드

<뉴턴 메시지 패드 제공: 애플>

꿈은 높은데…

스컬리의 꿈은 처음부터 엇나갔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말 그대로 쫄딱 망한 것이다. 지식 안내자의 개념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탓이 컸다. 뉴턴 메시지 패드는 소프트웨어가 부족하고, 필기 능력이 떨어졌으며, 배터리 사용시간이 짧았다. 뉴턴 메시지 패드가 지킨 것은 '휴대하기 편하다'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가격까지 비쌌다. 사용자들은 비싼 돈을 내고 뉴턴 메시지 패드를 구매할 이유를 찾지 못했다.

여러 제조사에서 다양한 형태의 뉴턴 제품군이 등장했지만,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는데 실패했다. 모두 사이 좋게 망했다.

뉴턴은 왜 실패한 걸까. '너무 앞서 나갔다'로 요약할 수 있겠다. 당시에는 방대한 데이터의 집합(인터넷)도, 편리하게 앱을 설치할 수 있는 장소(앱스토어)도, 멀티터치 스크린도, 한번 충전하면 하루 종일 사용할 수 있는 배터리도 없었다. 기술은 20세기인데 꿈은 21세기이니, 현실과 꿈의 괴리가 큰 제품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몽상가 잡스를 쫓아낸 스컬리 자신이 현재 기술로 실현할 수 없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스컬리가 예측한 미래의 핵심 기술은?

뉴턴의 실패 이후 스컬리는 애플을 경영하는데 흥미를 잃고 만다. 결국 1993년 애플을 떠나게 된다.

스컬리가 떠난 후 애플은 갖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적자에 시달리던 애플은 결국 예전에 쫓아낸 창업자 잡스를 최고경영자로 다시 불러들인다. 그 다음은 우리도 잘 아는 얘기다. 애플은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이어지는 성공가도를 걸은 후 세계 최고의 회사로 우뚝 선다.

하지만 잘 알려지지 않은 얘기가 하나 더 있다. 잡스는 회사 복귀 후 쓸모 없는 부서를 정리해 과거의 잔재를 모두 지워버렸다. 딱 하나 뉴턴 메시지 패드 개발 부서만 빼고. 그 부서는 애플 내부에 계속 존속했고, 결국 아이폰 탄생의 주역이 된다. 20년이 지나서야 스컬리의 꿈이 이뤄진 것이다.

애플을 떠난 후 스컬리는 형제인 아서 스컬리와 함께 투자 회사인 스컬리 브라더스 LLC를 설립하고 여러 유망 벤처기업 지원에 힘쓰고 있다. 스컬리가 마케팅의 천재일뿐만 아니라 미래를 예측하는 혜안이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스컬리는 스마트폰 이후를 이끌어나갈 차세대 IT 기기가 무엇일지 어렴풋이 알고 있지 않을까? 스컬리는 현재 워터마크 메디컬, MD라이브, 오댁스 헬스 솔루션즈, 미스핏 웨어러블 등 건강 관리 솔루션과 헬스케어 기기 기업에 왕성하게 투자를 진행 중이다.

글 / IT동아 강일용(zero@itdonga.com)

※본 기사는 네이버캐스트(http://navercast.naver.com/)의 'IT 인물 열전' 코너에도 함께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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